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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향곡의 계보⑤ 러시안 교향곡


경주신문 기자 / gjnews21@hanmail.net1398호입력 : 2019년 07월 11일

↑↑ 이동우
예술상생 대표
차이콥스키(P.I.Tchaikovsky/1840-1893)는 오늘날 발레 작곡가로 유명하지만, 교향곡도 잘 썼다. 전부 여섯 곡의 교향곡을 작곡했는데, 마지막 세곡이 걸작이다. 이중에서 4번 교향곡은 사연이 많다. 1877년에 차이콥스키는 제자 밀류코바와 원치 않은 결혼을 한 후 바로 이혼하게 된다. 마침 이때는 부유한 미망인, 폰 메크 부인의 후원이 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4번은 결혼실패의 충격과 미망인에 대한 연심이 얽힌, 복잡 미묘한 상황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 곡은 폰 메크 부인에게 헌정되었고 이듬해 초연되었다. 이후 차이콥스키는 후원이 준 여유로 4번처럼 완성도 높은 창작을 계속 이어갔다.

마지막 6번 교향곡 비창(1893년)은 조금 독특하다. 2악장이 빠르고, 3악장은 마치 피날레처럼 끝난다. 그래서 3악장이 끝나고 박수가 터지는 경우가 많다. 악장과 악장사이에 박수를 치지 않는다는 클래식계의 불문율을 무의식중에 깨뜨리게 된다. 반면에 4악장은 아주 조용하고 음울하기까지 하다.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견하는 것처럼 말이다. 차이콥스키는 6번 초연 후 불과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난다.

차이콥스키는 음악의 불모지였던 러시아에 서양음악을 들여와 이식한 러시아 음악의 선구자다. 그의 강점은 아름다운 선율이다. 러시아에는 그를 빼닮은 추종자가 있었다. 바로 라흐마니노프(S.Rachmaninov/1873-1943)다. 그는 평생 세편의 교향곡을 만들었는데, 1번 교향곡의 처참한 실패 후 정신치료를 받다가 피아노협주곡 2번을 만들어 재기한 일화는 유명하다. 하지만 러시아 교향곡의 전통을 이어간 사람은 누가 뭐래도 쇼스타코비치다.

1917년 러시아혁명은 자국 출신 스타음악가들의 망명을 촉진했다. 혁명 당시 중장년이었던 라흐마니노프(44)와 스트라빈스키(35)는 망명 후 조국의 땅을 밟지 못한 채 타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한편 26세였던 프로코피에프는 망명 후 귀국했지만 그리 행복하지 못했고, 당시 11세에 불과했던 쇼스타코비치는 아예 떠날 수도 없었다.

쇼스타코비치(D.Shostakovich/1906-1975)는 인민예술가로서 꽃길을 걸었다. 적어도 스탈린이 그의 오페라 ‘므젠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보다 자리를 박차고 나갈 때(1936년)까지는 말이다. 숙청의 위기에 몰린 쇼스타코비치는 이듬해 5번 교향곡 ‘혁명’으로 위기에서 탈출하게 된다. 5번은 본인의 내심과는 무관하게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구현하는 음악으로 평가받았다. 이때 소련 지휘계의 전설인 므라빈스키(Y.Mravinsky/1903-1988)가 도움을 줬고, 이후 두 사람은 평생을 함께하는 파트너가 되었다.

쇼스타코비치의 5번 교향곡과 관련된 일화 하나! 이곡은 1978년 세종문화회관의 개관을 기념하는 뉴욕 필하모닉의 공연프로그램에 들어있었다. 당시는 반공을 국시로 하는 군사정권시대여서 공산국가의 음악은 연주될 수 없었다. 가요 ‘아침이슬’이 금지곡이었던 시절이니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번스타인은 곡 변경요청을 무시하고 연주해버렸다. 다행히 아무 일없이 끝났지만 공연관계자는 공연 내내 마음을 졸였을 것이다.

쇼스타코비치는 1941년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자 7번 교향곡 ‘레닌그라드’를 작곡했고, 반전(反戰)의 메시지가 담긴 이곡은 서구에서 ‘쇼스타코비치 붐’을 일으켰다. 7번은 이어지는 8번, 9번과 함께 전쟁 3부작으로 불린다. 한편 쇼스타코비치는 9번 교향곡이 또다시 공산당의 비판을 받자 창작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하지만 1953년 스탈린이 죽자 곧 10번 교향곡을 만들어 활동을 재개한다.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의 쇠퇴기인 20세기에 무려 15편의 교향곡을 남겼다. 9번 교향곡을 쓰기만 하면 죽는다는 ‘9번의 저주’를 넘어선 것도 놀랍지만, 예술을 정치의 도구로 쓴 스탈린 치하에서 이룬 업적이기에 더욱 대단한 것이다. 이처럼 인고의 삶을 살다간 그의 작품은 오늘날에도 생명력을 잃지 않고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경주신문 기자 / gjnews21@hanmail.net1398호입력 : 2019년 07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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