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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 근대 건축물을 찾아서 ⑧감포읍 상편
드라마 세트장인가 영화촬영장인가, 멈춰있는듯한 시간의 감포읍풍경-일제강점기적산가옥의 명맥이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 감포읍3리를 찾아
2011년 09월 27일 1007호 [경주신문]
경주시 감포읍 3리 읍내번화가 거리엔(감포 제일교회 앞 거리)아직도 일제 강점기 적산가옥(적산가옥은 일제강점기때 지어진 가옥을 지칭하며 이하 일정가옥이라 함.)이 많이 남아 있다. 대부분의 일정가옥들은 2층 목조가옥으로서 호수다방,동조사진관,항구다방,옛골식당,제일 낚시점 등의 낮고 허름한 간판들을 달고 감포읍민의 생의 터전으로 여전히 건재하고 있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형성된 시가지로서 좁은 도로 양쪽으로는 2층 적산가옥들이 듬성듬성 남아있었다.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드라마 세트장 같은 감포읍의 거리는 70년대 소도시에서나 봄직한 풍경으로 아릿하게 다가왔다.
짭쪼롬한 젓갈냄새와 어디선가는 비릿한 생선냄새가 뒤엉켜 후각을 자극하는, 문자 그대로 어촌이자 항구도시였다.

↑↑ 1920년 당시 감포항 포구에 수많은 어선들이 있다.
ⓒ (주)경주신문사

● 감포항을 아시나요?
경주시의 동단에 위치한 감포는 달감(甘)자와 같은 지형을 닮아서 감포로 했다는 설과, 감은사가 있는 포구라고 해서 감은포라고 불리다가 감포로 축약되어 오늘의 감포항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현재 감포읍은 읍면적 44.84㎢, 인구 7,000여명으로, 본래 경주부 동해면이었으나 1895년(고종 32년) 장기군에 편입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경주군에 편입되어 양북면이 되었으며, 당시 감포 인구 3천여명 중 700~800명이 일본사람이었고, 이들은 대부분 수산업 관련 분야에 종사했다고 한다. 이들 일본인들이 영향력을 행사해 감포리는 양북면에서 분리돼 인접 9개리와 병합해 1937년 7월 1일자로 감포읍으로 승격했다.
감포항은 서, 남, 북 삼면이 최고 200m 이내의 낮은 구릉지대 및 평야로 싸여 있어 지리적으로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으며 일제강점기인 1937년 읍으로 승격된 동해에서 가장 큰 동해남부의 중심어항이었다. 감포항 앞 동해 남부 해역은 대륙붕이 잘 발달하고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지역으로 어자원이 풍부한 곳이다. 이 때문에 일제는 감포항을 어업전진기지로 삼았고 수산업 중심지역으로 성장시켰다.
감포읍은 바다 가까이 200m 내외의 산지가 해안에 급박하여 평야가 거의 없으며, 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다. 주어종은 꽁치·멸치·가오리 등 이며, 약간의 전복과 미역의 양식이 행해진다. 특산물로는 멸치젓갈, 미역, 전복, 오징어, 꿀 곶감 등이 있다.

● 드라마 세트장 같은 감포읍의 거리, 일제 강점기 적산가옥들
일제강점기때 감포항은 드나드는 일본인으로 북적였는데 당시 감포에는 일본인 이주어촌이 형성 되어있어 다수의 일본어민들이 촌락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오늘날까지 감포 읍내에는 일제시대 2층 목조 건축물들이 다수 남아 있으며 지금도 가게나 살림집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 슬레이트 지붕, 함석외장재의 일정 가옥들.
ⓒ (주)경주신문사

● 2차선도로확장공사로 일정가옥 비롯한 주택들 올해 철거계획
감포3리 시내 번화가 골목은 벌써 경주시에서 보상문제가 종료된 상황이다. 올해나 내년 쯤에는 철거가될 예정이라고 한다. 현재의 도로가 너무 좁아 2차선으로 확장하는 계획이 민원으로 결정된 상황이다. 바닷가 쪽의 가게와 일정가옥들은 올해나 내년즈음엔 모두 철거될 예정이라고 한다. 다시는 그 풍경을 볼수 없다고 하니 안타깝기 그지없지만 감포읍민의 오
랜 숙원이라고 하니 어쩔 수 없는 현실의 문제이다.

1, 제일 낚시점, 낚시선원이었던 황순곤씨(81세)가게

ⓒ (주)경주신문사

1945년 해방 후 6.25당시 부모가 인수한 집이다. 황씨의 부모는 뱃사람의 출입이 많아서 당시 쌀가게를 했다고 한다. 30~40년전에 슬레이트로 지붕을 바꾼 것 이외에는 옛 모습 그대로이며 내부수리도 거의 하지않았다.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도 그대로였다. 3~4년 전에는 일본인 후손들이 고향과도 같은 감포를 방문해 사진을 찍어가기도 했다고 한다. 황씨는 감포항은 1937년 인천항(당시 제물포항)과 같이 읍으로 승격될 만큼 규모가 큰 항구였다고 회고한다.

2, 양심만두찐빵가게: (손익명,59세)씨 가게

ⓒ (주)경주신문사

벽체는 흙이며 기둥은 목재이다. 건평은 5평 남짓이다. 이집도 일정가옥의 대표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지붕을 수리했다.
일본인들이 주로 2층으로 지은 이유는 건평을 작게하는 대신에 건물의 실용성을 높이기 위해 2층으로 지었다고 했다.

3, 옛골식당: 고영범(71세)씨 가옥

ⓒ (주)경주신문사

2층목조가옥의 형태로 복층구조이며 3대째 거주하고 있다. 원래 상호는 ‘평양식당’이었고 지금도 설렁탕을 주 메뉴로 하는 식당을 하고 있다. 100년 정도로 추정되는 가옥으로서 이집에 고씨가 거주한지는 60년이 되었다고 한다.
화장실을 수세식으로 고치고 2층 다다미방만 걷어내고는 거의 그대로 보존 된 가옥이다. 목재나 창문, 가옥의 구조가 거의 그대로였다. 2층으로 오르는 나무로 만든 계단이 원형 그대로 보관되어 있는 귀한 자료의 집이었다. 작은 집이었지만 방속에 또 방을 가진 마치 미로를 찾듯 작은 여러개(7개)의 방을 감추고 있었다.
또, 70㎝정도의 작은 회랑(복도)을 가진 구조였다.

4. 감포제일교회
이 교회터는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하던 자리였다.
교회로 올라가는 가파르지만 탄탄하게 보이는 콘크리트의 계단은 신사참배를 하러가던 계단이며 아직 그대로 남아있다. 1945년 8월 해방과 동시에 일본신사를 점거하고 교회당으로 사용했다. 1955년 신사를 허물고 교회건물이 신축된다.

5. 젓갈저장창고 :우용이(92세)씨 창고

ⓒ (주)경주신문사

히노끼(히노끼의 원산지는 일본, 수령 300년 이상 되는 한대성 수종으로 기소오목의 수종으로 분류, 내수성과 내인성이 강하고 목향이 좋음.) 라는 순수 일본자재를 가져와서 직접지었다. 일본인이 처음 와서 지었으니 70~80년 전 건물이다. 해방 후에 우씨가 인수하고 멸치젓을 보관했으나 멸치고깃물이 길에 떨어져 비린내로 인한 주민들의 원성으로 계속 운영하지 못했다고 한다. 인수한 지는 50년이 된다.
지붕을 함석지붕에서 30여년 전 슬레이트로 바꾼 것 외에는 원형 그대로이다. 올해 내린 눈의 무게로 처마가 허물어져 버렸다고. 원래는 당시 많이 잡히던 어종이었던 고등어를 염장해서 보관하고 팔던 곳이었다.
간고등어였던 셈이다. 이를 일본인, 대구, 부산 등지에 팔았다고 한다.

ⓒ (주)경주신문사
6.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대중목욕탕
대중목욕탕이 많이 없었을 당시 수 십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이 목욕탕은 동네 근처에선 유일한 목욕탕이었다. 당시 손님이 많아 주인은 많은 돈을 벌어 호텔도 지었다고 한다. 내부구조도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고 주민이 전했다. 수도가 개발되기 전까지는 불을 때서 우물물을 퍼다가 끓여서 목욕탕물로 사용했다.

7. 감포제일교회 아랫집(감포안길)
원래주인은 마츠오까상으로 불리는 일본인 여자였고 다음 소유주는 영남갑부라 불리워진 통조림공장의 주인이었던 이상용씨였다. 추정 건축연도는 68~9년전 건물로 주인의 자녀까지 4대째 거주하고 있다. 주인의 시조부님 때부터 거주한 이집은 일본집의 특색이 그러하듯 습기가 잘 차지 않는 것이 장점이다. 해변가 집들은 해풍으로 인한 습기 때문에 주로 나무로 지어 통풍이 잘 되었고 사면이 격자무늬 유리창으로 되어 있었다고 회고한다. 주요 자재인 목재는 스기목으로 방충에 강하다는 장점이 있다. 유리문으로 되어 있어 너무 추워서 불가피하게 유리창문을 없애는 수리를 했다고 한다. 2층 일본식 다다미방을 20여년 전에
수리했는데 2층엔 아직도 ‘후시마’ 문이라 불리는 벽장이 남아 있다. 다다미방은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바닥이 덜 차가웠던 좋은 점이 있었다.

ⓒ (주)경주신문사


8. 일제강점기 흔적이 남아있는 골목풍경
이 골목은 당시 3층 목조 가옥들이 즐비했으나 화재발생으로 불타버려서 많은 가옥들이 소실되어 버렸다고 한다.
당시 부유한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던 번화가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 근거로 우선, 일본신사가 지금의 제일교회자리에 있었고 평양관, 신라관 등의 이름의 술집들과 목욕탕, 우체국, 젓갈공장 등도 있었던 잘 지어진 집들이 많았다. 이 골목은 감포의 명동으로 불려질 만큼 북적였다. 당시 감포는 황금어장이었고 경상북도에서는 감포가 최고부자 도시였다고 한다.

ⓒ (주)경주신문사


9. 석빙고라 불리는 창고가 있는 집(감포 안길)
일정가옥의 저장창고로 추정되는 공간이 딸린 집이 있다. 생선도 보관하고 과일도 저장, 보관했던 장소이며 이 집의 뒷편을 통해 이 창고로 바로 내려올 수 있는 길이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 이 창고는 아치형의 콘크리트로 아주 견고하고 정직하게 지어진 건축물이다. 감포의 까만돌인 ‘오석돌’을 지게에 지고 와서 지었으며 70년은 족히 넘은 가옥으로 추정된다.

10. 감포읍내 최대 사교장일 듯한 유원다방 옆 호수다방
2층 목조 맨 아래 피카소 미술원, 이들 건물 모두가 일제시대 형태의 2층 목조가옥이다.

다음호, 감포읍 일정가옥 하편에서는 감포3리 이외의 감포의 다른 지역에 산재해 있는 일정가옥을 비롯한 근대건축물을 싣는다.
선애경 기자  violetta2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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